파르살루스 전투
파르살루스 전투는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운명을 가른 중요한 내전 중 하나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간의
권력 다툼에서 벌어진 결정적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기원전 48년,
그리스 테살리아의 평야인 파르살루스에서 벌어졌습니다.
1. 배경
제1차 삼두정치의 붕괴:
카이사르(군사력), 폼페이우스(정치력), 크라수스(재정력)가 결성했던 삼두정치는
크라수스의 전사(기원전 53년, 카르라이 전투)로 균형이 깨지면서 붕괴됨.
카이사르의 권력 확대:
갈리아 정복으로 대중적 지지와 막강한 군사력을 얻은 카이사르가
로마로 귀환하려 하자, 원로원은 무장해제를 요구함.
루비콘강 도하(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는 말과 함께
루비콘강을 건너며 내전이 시작됨.
폼페이우스의 퇴각:
카이사르의 진군에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세력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고, 동방의 병력을 규합함.
2. 전개
장소: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평야,
파르살루스 근처
병력 규모:
카이사르군:
약 2만2천 명의 보병과 1천 명의 기병
폼페이우스군:
약 4만5천 명의 보병과 7천 명의 기병
전술적 대립:
폼페이우스는 수적 우위를 믿고
기병으로 카이사르의 우익을 붕괴시키려 했음.
카이사르는 기병 뒤에 숨겨둔 소수의 숨은 보병을 이용해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혼란에 빠뜨림.
결과:
카이사르의 기습 전술이 성공하면서
폼페이우스 군은 붕괴되고 대패함.
3. 결과 및 영향
폼페이우스의 패주:
패전 이후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피했으나,
이집트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의해 암살당함.
카이사르의 권력 강화: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로 부상하게 되며,
이후 종신독재관에 오름.
로마 공화정의 사실상 종말:
이 전투를 기점으로 공화정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로마는 제정으로 나아가는 길에 들어섬.
역사적 평가: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천재적인 전술과
정치적 결단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됨
연도 | 주요 사건 |
기원전 60년 | 제1차 삼두정치 결성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
기원전 53년 | 크라수스, 파르티아 원정 중 전사 (카르라이 전투) → 삼두정치 붕괴 시작 |
기원전 49년 | 카이사르, 루비콘강 도하 → 내전 시작 (“주사위는 던져졌다”) |
기원전 49년 | 폼페이우스, 원로원 세력과 함께 동방으로 후퇴 |
기원전 48년 8월 | ⚔️ 파르살루스 전투 (그리스 테살리아 평야) → 카이사르 대승, 폼페이우스 대패 |
기원전 48년 9월 | 폼페이우스, 이집트로 도피했으나 암살당함 |
기원전 46년 | 카이사르,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됨 |
기원전 44년 3월 15일 | 카이사르 암살 (브루투스 등 공화주의자들의 칼에 의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