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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

예박이아빠 2025. 6. 25. 22:17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로마 제국의 동방 팽창 야욕과

개인의 명예욕이 맞물린 비극적인 원정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로마 정치질서의 붕괴와 삼두정치의 균열,

그리고 로마-파르티아 간 오랜 적대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배경

 

제1차 삼두정치(기원전 60년):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정치), 폼페이우스(군사)와 함께

권력을 분점한 로마의 부호였음.

 

 

정치적 균형 유지: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으로 군사적 명성을 얻고,

폼페이우스도 대외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 상황에서,

크라수스는 자신만의 무공을 원함.

 

 

경제적 이해관계:

크라수스는 동방 무역과 파르티아의 부를 노렸고,

자신의 영향권 확대를 위해 원정을 시도함.

 

 

원로원 승인 없이 출정:

기원전 55년,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후,

로마 원로원의 공식 승인을 받지 않고

파르티아 침공을 감행함.


원정의 전개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약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현 이라크)로 진격

 

 

로마군의 약점:

중무장 보병 위주의 전형적 로마 군단

→ 광활한 사막과 기병 중심 파르티아 군대와 부적합

 

 

파르티아의 전략:

전격적인 기병 및 궁병 전술,

가벼운 장비로 로마군을 지속적으로 교란

 

 

카르라이 전투(Carrhae):

파르티아 장군 수레나(Surena)가 이끈

기병대가 로마군을 포위하고 섬멸

 

크라수스 아들 전사

 

크라수스는 협상 중

암살되거나 살해당함

 

로마군 2만 명 이상 전사, 1만 명 포로


결과 및 영향

 

삼두정치의 붕괴: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삼두정치의 균형이 무너짐

→ 카이사르 vs 폼페이우스 대립 격화

 

 

로마의 치욕:

카르라이 전투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기록됨

 

 

파르티아의 부상:

로마는 동방에 또 하나의

강력한 제국이 있음을 인식하게 됨

 

 

장기적 적대 관계 시작:

이후 수세기 동안 로마와

파르티아의 갈등 지속

 

 

정치적 상징의 파괴:

파르티아는 크라수스의 잘린 머리를

금으로 채워 왕에게 보냄

→ 로마에 치욕적인 조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