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로마 제국의 동방 팽창 야욕과
개인의 명예욕이 맞물린 비극적인 원정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로마 정치질서의 붕괴와 삼두정치의 균열,
그리고 로마-파르티아 간 오랜 적대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배경
제1차 삼두정치(기원전 60년):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정치), 폼페이우스(군사)와 함께
권력을 분점한 로마의 부호였음.
정치적 균형 유지: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으로 군사적 명성을 얻고,
폼페이우스도 대외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 상황에서,
크라수스는 자신만의 무공을 원함.
경제적 이해관계:
크라수스는 동방 무역과 파르티아의 부를 노렸고,
자신의 영향권 확대를 위해 원정을 시도함.
원로원 승인 없이 출정:
기원전 55년,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후,
로마 원로원의 공식 승인을 받지 않고
파르티아 침공을 감행함.
원정의 전개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약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현 이라크)로 진격
로마군의 약점:
중무장 보병 위주의 전형적 로마 군단
→ 광활한 사막과 기병 중심 파르티아 군대와 부적합
파르티아의 전략:
전격적인 기병 및 궁병 전술,
가벼운 장비로 로마군을 지속적으로 교란
카르라이 전투(Carrhae):
파르티아 장군 수레나(Surena)가 이끈
기병대가 로마군을 포위하고 섬멸
크라수스 아들 전사
크라수스는 협상 중
암살되거나 살해당함
로마군 2만 명 이상 전사, 1만 명 포로
결과 및 영향
삼두정치의 붕괴: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삼두정치의 균형이 무너짐
→ 카이사르 vs 폼페이우스 대립 격화
로마의 치욕:
카르라이 전투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기록됨
파르티아의 부상:
로마는 동방에 또 하나의
강력한 제국이 있음을 인식하게 됨
장기적 적대 관계 시작:
이후 수세기 동안 로마와
파르티아의 갈등 지속
정치적 상징의 파괴:
파르티아는 크라수스의 잘린 머리를
금으로 채워 왕에게 보냄
→ 로마에 치욕적인 조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