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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시 전투

예박이아빠 2025. 7. 4. 21:54

크레시 전투(Battle of Crécy, 1346년 8월 26일)는

백년전쟁 초기의 대표적인 전투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압도적으로 격파한 사건입니다.

 

이 전투는 중세 전통 전술의 한계를 드러내고,

근대적 전쟁 양상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잉글랜드 장궁(longbow)의 위력

세계에 알린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원인

 

1. 백년전쟁의 확산

 

에드워드 3세(영국왕)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1337년 전쟁을 선포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이를 부정하고

영국군의 프랑스 북부 침공에 맞서 방어 준비

 

 

2. 에드워드 3세의 북부 공세

 

영국은 해협을 건너

노르망디·피카르디 지역을 공격하며

약탈과 점령을 반복

 

크레시 인근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정면 충돌


외교적 노력

 

전투 직전까지 뚜렷한

외교적 중재 노력은 거의 없음

 

교황청도 백년전쟁 초기에는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며 적극 개입하지 않음

 

이 시기의 전투들은

왕위 정통성 및 영토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의도가 강했음


경과 및 주요 사건

항목 내용
전투 당일 영국군은 크레시 근처 고지에 진을 치고 방어진형 구축
무장 기사 vs 장궁병 프랑스군은 기병 중심, 영국군은 장궁병 중심 → 병종 차이
영국 장궁의 위력 빗발치는 화살로 프랑스 기사대의 정면 돌격을 궤멸
제노바 궁수 실패 프랑스의 고용병 궁수(제노바)는 영국 장궁에 압도당해 무력화
프랑스 왕족 전사 보헤미아 국왕 요한 등 다수 귀족 사망
 

결과

 

영국의 대승리
→ 병력 수에서는 열세였지만,

전술·지형·병종 운용에서 압도

 

 

프랑스 귀족의 대량 전사

→ 중세 기사 계급의

전통적 전쟁 방식이 한계에 부딪힘

 

 

칼레 포위전으로 이어짐

→ 이후 영국은 칼레를 점령하고 200년 넘게 점유


영향

 

중세 전쟁의 전환점
→ 말 탄 기사 중심에서

보병·원거리 무기 중심 전투로 변화

 

 

장궁의 군사 전략적 가치 부각
→ 이후 아쟁쿠르(1415) 등에서도 결정적 역할

 

 

프랑스 군제 개편 촉진
→ 후일 프랑스는 상비군과 총기 도입으로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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